나의 갭이어 이야기 10회 미생
흔히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일보다는 사람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곤한다.
좋은 회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좋은 상사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취직을 하고 나서야 공감을 할 줄 알았다. 아직은 남의 이야기일 줄 알았다.
정말 꿈에도 몰랐다.. 태국에서 이런 말을 곱 씹게 될 줄이야…
캄보디아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태국의 NGO로 이동했을 때 캄보디아와는 다른 일에 적응이 잘 안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먼저 일하고 있던 친구들 덕에 이것저것 배우고 의지를 불태우며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갈 때쯤 나는 새로 오게 된 슈퍼바이저와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였을까 비가 우중충하게 많이도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내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았다.
새로 온 슈퍼바이저는 내 프로젝트를 그녀의 프로젝트를 합쳐 하나로 정리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어시던트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는 그녀가 유능한 컨설턴트라고 들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실제로 그녀는 중국계 미국인으로써 6개 국어를 쓰고 말하고 읽을 줄 아는 분이었다. 저널리스트이기도 했고 유명한 컨설팅 회사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여행도 하셨던 분이다. 나는 그녀가 내가 추구하는 여성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것이 잘못된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마치 지옥행 티켓을 끊은 지도 모르고 기차를 타버린 승객이 출발하고 나서야 그 무서움을 깨달은 것 처럼 모든 것이 이미 늦은 후였다.
그 분의 일에 대한 능력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고 누구보다도 열정적이었다. 그녀의 업무는 밤에도 주말에도 이어졌다. 24시간 일만 생각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워커홀릭이었다. 그러한 열정을 뒷받침 할 분석력, 냉철함 그리고 문제 파악능력까지 모든 게 훌륭했다. 바로 옆에서 보게 되는 그녀의 일의 양과 정보력 그리고 냉철함에 진심으로 놀랐고 나 또한 도울 일이 있으면 돕기위해 노력 했다. 비단 그것이 늦은 밤과 주말까지 처리해야 하는 것이라도 처음에는 기꺼이 함께 서칭하고 정보를 공유했다. 그리고 그녀의 방이 바로 내 앞 방이었기에 더욱 효율적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녀와의 협업이 왜 지옥행이라고 했는지 아직 이해가 안 되실 수 있다. 일이 많아서 그렇게 느꼈냐고? 그게 아니다. 완벽해보이는 그녀엿지만, 타인에 대한 존중과 협동심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와 일을 할 때는 존중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방적인 업무처리 방식과 일방적인 의견조율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그녀가 공적인 일 외에 사적으로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다. 언제나 일 이야기로 시작해서 일 이야기로만 끝이 났다.
그런 그녀와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일과 일로 지속되고 반복되는 관계가 고통스러웠다. 사람이 일 이야기만 하며 지낼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됐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매일 밤 건너편 방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또 어떤 일을 시킬 줄 몰랐으니까. 물론 일을 하러 태국에 갔기에 일을 하는 게 맞았지만 정말로 쉼 없이 하는 일로 숨이 막혔다. 거기다가 나는 그녀에 비해 모르는게 너무 많았다.
아는 게 없다는 것은 곧 바로 성취감에 영향을 주었다. 성취감은 일하는 시간과 반비례하여 작아졌다. 영어가 아직도 많이 서툴러서 어떤 표현이 더 격식 있는 표현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 처리를 열심히 했지만 시간이 많이 걸렸고. 그러한 결과물에 대한 그녀의 날카로운 피드백은 힘든 시간을 더 힘들고 지치게만 만들었다. 그리고 나에게 시켰던 일을 처리해가면 이미 그녀가 알아서 끝내 놓는 식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쏟아 힘들게 일 한 의미가 없어지니 순간 적으로 힘이 빠지면서 아무 의욕도 없어지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지쳐갔다. 내 의견이 이렇게 쓸모 없는 것이었나 싶을 정도의 일방적인 의사결정과 일방적인 일처리 그리고 한결같이 부정적인 피드백까지 힘들게 했다.
주변 동료들은 자신들은 잠깐이라도 그녀와 함께 일을 하면 힘든데, 나는 오죽하겠냐며 나를 위로하기 바빴다. 주말에는 나와 함께 여행도 가주고 그간 힘들었던 이야기도 들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동료들과 내 오토바이가 없었다면 진작에 박차고 나왔을 것 같다.
동료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말도 없어졌고 모든 일에 의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들었다. 스스로 자존심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존심이 한번 뭉게지니 회복이 안됐다. 하루에도 수십번 기분이 오락가락하면서 퇴근시간만을 바라봤다. 갭이어를 갖고 처음으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는 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기분전환 겸 드라이브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우울해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한숨은 깊어져갔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한없이 우울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새로운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바보같이 참았다는 생각이 맴돌았다. 아무리 그녀의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나의 의사표현은 정확히 했어야 했는데 그녀의 앞에서 나는 무조건 예스맨이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든 일에 관해서는 내 몫은 스스로 챙겨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장단에 무조건 맞춰줄 수록 지금의 상황은 악화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는 천천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고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도록 준비를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였던 망가진 내 자존심을 돌보기 시작했다. 생각하다 보니 애초에 자존심이 상할 일도 없었다. 나는 과거 짧았던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일을 잘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부터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피드백을 잘 기록하고 개선했으면 나에게 더 좋은 요소가 될 수 있었을 꺼라고 생각했다. 일을 하고 배우는 과정에 집중하지 않고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출구가 보였다. 슈퍼바이저에게는 그 동안 섭섭했던 나의 생각을 전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내가 해야될 일을 찾았고 과정에 집중했고 나는 내 방식대로 출구를 찾았다.
아니 찾은 줄 알았다.
2주가 지난 후, 모든 것은 제 자리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끔찍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확실히 알게됐다. 모든 사람이 자비와 관용과 이해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너무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금도 그녀가 보여준 프로패셔널한 모습은 잊지 못한다.
일을 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배울 점이 많았고 지금도 잊지 않으려 한다. 메일을 보내는 방식, 미팅을 할 때 상대방에게 썼던 단어들 그리고 협상을 할 때 그녀가 보여줬던 카리스마와 정보수집 능력까지.
힘들었던 기간을 통해 얻은 이 경험은 내겐 그 어떤 자격증이나 스펙보다 값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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